피지에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300년경이다.
섬동남쪽 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고 하는 당시의 사람들은 피지로 건너오는 도중, 뉴기니아 방면의 원주민(오스트라로이드)과의 혼혈을 반복해왔다고 여겨진다.
그 당시 피지에 살고 있었던 것은 현재 뉴칼레도니아에 살고 있는 멜라네시아인과 같으며 현재의 피지인은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의 혼혈로서 그 후에 형성되었다고 추측된다.
 

유럽인에 의해 피지제도가 알려지게 된 것은 1643년 네덜란드의 항해탐험가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시초다. < >

그는 항해 도중, 피지제도 이외에도 많은 남태평양 섬들에 배를 정박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의 타스매니아이며 뉴질랜드라는 국명은 그가 붙였던 이름이고, 타스마니아는 그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이다. < >

타스만 이후, 피지에 도착했던 것으로 확인된 사람은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다.< >

 1774년 쿡 선장이 2번째로 태평양을 항해 할 때, 피지제도 동남부의 작은 섬에 상륙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타스만이든 쿡이든, 당시 그들은 피지 전체 영토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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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의 대부분을 최초로 확인한 유럽인은 월리엄 브라이(William Bligh) 선장이다. < >

1789년「하우디호의 반란」으로 유명한 브라이로 통가부근에서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에 의해 보트로 추방되어, 48일간의 표류중 비치레부섬을 포함한 39개의 섬들을 확인하였다. < >

이 확인을 기초로 해서 브라이는 피지제도 최초의 지도를 만들었다.< >

 

이후, 브라이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뉴사우스 웨일즈주 총독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자신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부하나 개척민에게 미움을 받아 총독의 지위도 겨우 2년만에 사임하게 되었다.< >

브라이 이후, 몇 명의 항해자들에 의해 피지의 모든 섬들이 확인되었다. < >

그러나, 유럽인에게 있어 피지제도에 사는 사람들은 흉악하고, 「식인종」라고 해서, 실제로 유럽인의 이민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반세기 이후인 19세기초 부터 였다.< >

1844년, 최초의 선교사가 피지섬에 와서 기독교 포교를 시작했으며 이에 상인들도 함께 들어왔는데, 그들이 유럽으로부터 총을 가지고 들어 왔기 때문에 피지제도는 큰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 >

당시 6개의 왕국으로 나눠져 있던 피지는 각 왕국이 총을 보유하게 되었고 대립이 심각해짐에 따라, 피로 피를 씻을 정도의 전쟁이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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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혼란을 끝내고 피지제도를 통일했던 사람이 바우(Bau)족의 자콘바우(Cakobau)왕이다. < >

「카바의 전투」에서 우선 바우족 전체를 통일한 그는 그 기세를 이어 전국을 통일했다. < >

더욱이 1854년, 이웃 통가의 왕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에 영향을 받아 그 자신도 개종하여 기독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보다 결속력이 강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 >

 

1871년, 자콘바우 왕은 피지왕으로 인정받아 행정을 개편, 3년 후인 1874년 10월에 영국에 피지양도를 제의, 96년간에 이르는 영국 식민지시대로 들어간다. < >

이 때부터 오발라우섬 레브카에 수도를 정하고 사탕수수 산업(Plantation)이 시작되며 1879년 인도에서 최초의 계약노동자가 피지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인도인 노동자는 해마다 증가, 결국은 피지 총인구의 절반정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 >

이것이 현재의 인종대립으로 이어지리라고는 그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 >

피지는 1882년에 수도를 현재의 비치레부섬 수바로 옮겨, 남태평양의 중심국가로서의 위치를 서서히 굳히기 시작하고 사탕수수 농장도 기간산업으로 정착되어 1970년 10월 10일에는 열망하던 독립을 이룬다. < >

영연방 30번째 가맹국으로, 초대수상에 라토 사 카미세세 마라가 임명되었다. < >

그러나, 그 후 경제발전과 함께 1987년 인도인의 정치참가 등을 포함한 정책을 내세운 신정권이 선거에 의해 수립되었으나 피지인 민중의 권리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란부카 중령이 이끄는 군에 의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고, 그 후에 대령에 승진한 란부카는 공화제를 선언. 영연방을 이탈한 후, 1990년 7월 25일에 피지인에 유리한 신헌법을 공포하고 영연방에도 복귀, 국명도 「피지공화국」로 바꾸었다. < >

그리고 1999년 5월에 열린 총선거에서는 인도인 챠우드리를 리더로 하는 연합정권이 발족되어 란부카는 수년동안 통치했던 수상의 자리를 비워주게 되었다.< >

 
 

이 정권이 발족된지 1년 후, 피지인 조지 스페이트를 중심으로 하는 무장단체가 국회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

스페이트는 체포되었지만, 초우도리 수상과 마라 대통령은 사임하였고 같은 해 7월에 일로일로, 세니로리 잠정 정,부통령이 취임하고 라이세니아 가르세씨를 신수상으로 하는 잠정 문민정권이 탄생했다. < >

2001년 3월에는 GCC(전통적 수장 회의)의 임명을 받아 일로일로 세니로리 정,부통령이 정식으로 취임해, 가라세를 수상으로 하는 선거관리내각이 발족한다. < >

그리고, 8월에 열린 총선거에 따라 가라세가 9월 10일, 수상에 취임하게 됨으로서 정국은 일단 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21세기를 맞이한 지금, 피지가 어떻게 변화, 발전을 이루어 갈까 하는 기대를 포함, 앞으로 피지의 동향이 주목된다.< >